055-933-7463

뉴스

작성일 2016-09-12

갑산리(甲山里, 갑산, 진읍, 토개)는 본래 초계군 지역으로 고갑산(古甲山)이라 불렀는데 계포(械浦, 흔히 진읍’, ‘진늪’)와 토포(吐浦, 흔히 토개’)를 병합해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갑산리로 율곡면에 편입되었다. 갑산리는 서쪽은 낙민리와 북쪽은 용덕산(龍德山)을 사이에 두고 내천리(內川里)와 남쪽은 초계면과 경계하고 있으며 동쪽은 황강이 동남으로 흘러 쌍책면과 접해있다. 갑산리는 갑산1(甲山), 갑산2(械浦), 갑산3(吐浦)로 나뉜다. 이곳은 황강 유역으로 예부터 수운(水運)이 편리한 곳이었으며 넓은 평야지로 형성되어 물물교환이 많이 이루어졌으며, 토포(吐浦)에는 예부터 농창(農倉)이 있었다고 전한다. 쌍책면 옥전 고분군이 바로 마을 앞이므로 사람이 거주한 역사는 오래되어 삼한시대 이전부터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910() 오전, 안희복농장의 돼지축사 신축 관련 축사건립반대주민대책본부에서 홍천희 이장을 만났다. 아래는 그와 나눈 얘기다.-임임분 기자

 8861d98c7f67fd39a4001a4dfaf385e7_1473663431_94.jpg

 

 

 

 

돼지돈사 건립 반대 투쟁, 참 힘들었다

 

홍천희, “마을이 살만해야 외지인도 들어와 마을이 번창한다” ©임임분

 

자기소개를 해달라.

1954년 갑산2구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계산초, 초계중학교까지 다닌 뒤 대구에 가서 고등학교 다녔고 대학 못가고 바로 군 입대하고 제대한 뒤 부산으로 가서 사업하며 살았다. 그러다 몸도 나빠지고 도시살이 그만하고 고향에 가서 살고 싶어서 가족은 부산에 두고 혼자 고향으로 들어온 지 7년 됐다. 처음엔 귀촌이었는데, 몸도 좋아지고 소일거리 삼아 쌀농사 조금, 이모작으로 마늘·양파, 소도 세 마리 키운다.

 

고향으로 가겠다고 하니 가족은 흔쾌히 동의했는가?

그랬다.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고 싶다고 하니 그러라고 했다. 고향에 빈집으로 있던 부모님 집, 부모님이 짓던 농지, 세 주고 있던 농지도 있어서, 지자체에서 주는 빈집수리지원금 받아 집도 고치고 해서 살고 있다

 

이장 경력은 얼마나 되는가?

4년차다.

 

이장 일 외 하고 있는 지역사회활동이 있는가?

바르게살기운동 회원이고 학교 동창회 활동도 한다.

 

갑산2구마을 주민 현황은?

30가구에 47명이 살고 있다. 최근에 귀농한 집에 있는 유치원생이 가장 나이 어린 주민이고 97세 어르신이 최고령 주민이다. 주력층은 70. 주민 15%만 생계활동을 하는데 주로 농사를 짓는데 소(100마리) 키우는 농가도 한 집, 배 농사 짓는 농가도 있다.

 

갑산1·2·3구는 안희복농장 돼지축사 신축 반대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이 사안 상황은 어떠한가?

갑산리가 청정지역으로 살기 좋은 마을이었다. 마을에 이미 도나도나라는 돈사가 있어 골치꺼리였는데 또 돈사가 들어온다고 해서 주민들이 건립반대를 하기로 한 때가 올 7월 초다. 법에서 허락한 사안이라 싸움이 참 어려웠다. 싸움 시작하니 법원, 경찰에서 서류 보내오고 오라 가라 하니, 반대투쟁 앞에 선 대표들은 각오한 일이지만 고령의 주민들은 불안해하고 힘들어해서 결국 안희복농장 쪽과 합의하기로 했고, 97일 진주에서 서로 만나 합의했다. 돈사시설을 주민의 요구대로, ·폐수·악취 관리 잘하고 돈사로 드나드는 차량의 안전하고 깨끗한 이동 등 합의문에 서로 서명하고 공증도 받았다.

 

마을 공동의 사안으로 싸움을 해본 소감은?

참 힘들었다. 살면서 집회장에 한번 가보기를 했나, 처음 하는 일이니 모든 일이 다 서툴렀다. 우리 나름으로는 열심히 주민 모아내고 집회한다고 하는데, 누구는 무슨 집회가 그 모양이냐, 좀 과감하게 제대로 좀 해라는 얘기도 하고...아니 과감하게 하려고 해도 고령 주민 데리고 어떻게 과감하게 하나? 더구나 올 여름은 어찌나 더웠는지, 농성장 앞에 가림막 하나 쳐놓고 하는데 그마저도 밤새 비오면 엉망이 되어 있고, 어르신들 모아놓고 더운 날 싸우다가 큰일 낼까 싶어 부랴부랴 대책본부에 컨테이너 사무실도 들여 냉방처리해서 어르신들 거기로 모시기도 하고...마을에 젊은 층이 없으니 이장 셋에 소 키우는 농가까지 넷이 그 일을 다 해야 했다. 젊은 층이 열 명만 있어도 더 잘 할 수 있었을 싸움이다. 어르신들과 함께 하루하루 너무 힘들어서 두 달 싸운 일만 해도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밖에서는 무슨 싸움을 그렇게(무르게) 하냐, 끝까지 싸우면 이길 싸움인데라고 하는데, 하기 좋은 얘기고, 농한기라 또 가능한 일이었지, 나부터도 농번기가 되면 그마저도 못할 싸움이라고 봤다. 합의하면서 손해배상, 가처분 같은 소송은 취소했고 이미 진행되고 있는 조사 같은 일은 또 대응해야 해서 오후에 또 경찰서에 조사 받으러 가야 한다.

 

향우들 반응은 어떠했나?

마을에 있던, 지금은 폐교되고 없는 계산초 졸업생 600여명이 이번 싸움에 많은 관심과 도움을 줬다. 후원금도 내고 집회 참가도 하면서 큰 힘이 됐다. 한가위 때 향우들과 함께 하는 큰 집회도 예정되어 있었는데, 합의와 함께 취소됐다. 합의에 따른 주민 보고는 합의한 97일에 바로 했다. 70%는 잘 했다고 하고 30%는 더 싸워서 이겼어야 하는 싸움이었다, 그런 반응이었다. 아쉬워하는 주민들 마음은 이해하지만, 끝까지 싸우는 일의 어려움도 현실이니까.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