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23-02-20
닳지 않는 손
서정홍
날마다 논밭에서 일하는
아버지, 어머니 손.
무슨 물건이든
쓰면 쓸수록
닳고 작아지는 법인데
일하는 손은 왜 닳지 않을까요?
나무로 만든
숟가락과 젓가락도 닳고
쇠로 만든
괭이와 호미도 닳는데
일하는 손은 왜 닳지 않을까요?
나무보다 쇠보다 강한
아버지, 어머니 손.
2005년, 농부가 되고 처음 맞이하는 어느 봄날 아침이었어요. 얼굴을 씻는데 갑자기 얼굴이 작아졌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거울을 보고 또 보아도 얼굴은 작아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작아졌다는 느낌이 들까?’ 이런 생각을 하다 문득 손을 보았어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바닥과 손가락에 굳은살이 생기면서 단단하고 굵어졌어요. 그래서 얼굴이 작아졌다는 느낌이 들었구나 싶었어요.
농부들은 바쁜 농사철이 되면 해보다 먼저 일어나 어스름이 짙어 갈 때까지 일을 해요. 나는 그렇게 부지런히 농사지으면서도 손바닥과 손가락이 단단하고 굵어졌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무슨 물건이든 쓰면 쓸수록 닳기 마련인데 왜 일하는 손은 닳지 않을까요? 그날 아침, 내가 내 손을 만져보면서 참으로 신비스럽고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날 저녁에 농사일 마치고 돌아와 고단한 몸으로 쓴 시가 <닳지 않는 손>이에요.
이 시를 쓰고 나서 이런 생각이 찾아왔어요. ‘농부가 쓴 시가 교과서에 실리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경험을 나눌 수 있게 말이야.’ 그런데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그 꿈이 이루어졌어요. 아랫마을 가회중학교에 다니는 민호가 알려주었어요. “우리가 공부하는 중학교 2학년 교과서 ‘천재생활국어’에 선생님 시가 실렸어요.” 시를 써서 이름을 알리고 살림살이에 보탬이 되기도 하지만, 그 무엇보다 농부의 마음을 학생들과 나눌 수 있어 무척 기뻤어요.
여러분도 쓰면 쓸수록 단단하고 굵어지는 고마운 손을 주제로 시 한 편 써보면 어떨까요? 시를 쓰기 어렵다고요? 한평생 살림살이 꾸려나가느라 손바닥에 굳은살 박인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 손을 만져보세요. 시가 저절로 찾아오지 않을까요?
글쓴이 서정홍 시인
(약력 : 가난해도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이 글을 써야 세상이 참되게 바뀐다는 것을 가르쳐 준 스승을 만나,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동안 여러 시집과 산문집을 펴냈다. 전태일문학상, 우리나라좋은동시문학상, 서덕출문학상, 윤봉길농민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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