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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작성일 2023-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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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없으면


서정홍


누가 나 대신

들녘에서 땅을 갈고 있습니다.

누가 나 대신

공장에서 옷을 만들고 있습니다.

누가 나 대신

땡볕에서 집을 짓고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날마다 구수한 밥을 먹고

날마다 따뜻한 옷을 입고

날마다 편안하게 잠을 잡니다.

 

나는 누가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느 날, 옷을 입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찾아왔어요. ‘이 옷은 누가 만들었을까. 옷을 만들면서 힘들거나 위험한 일은 없었을까. 옷을 만드는 노동자들은 일을 마치고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자기 집은 있을까.’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는 옷이라 생각하면 그만이겠지만, 그날따라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어요. <‘누가없으면>은 그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 쓴 시예요.

제가 살고 있는 합천에는 원경고등학교(지금은 합천평화학교로 바뀌었음)가 있어요. 얼마 전, 학생들한테 강연을 해 달라고 해서 찾아갔어요. 그날 아침에 교장 선생님이 제가 쓴 시를 몇 편, 학교 방송을 통해 낭송했다고 해요. 그 몇 편 가운데 <‘누가없으면>이 있었대요. 강연을 마칠 때쯤 교장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 시를 아침에 낭송하면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날까지 누구 덕으로 살아왔는데 한 번도 그 누구한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갖지 못했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앞으로는 밥도 천천히 먹고, 옷도 천천히 입고, 신발도 두 손으로 잡아 천천히 신어야겠다는 다짐을 했어요. 그래야 고마운 마음, 잊지 않을 테니까요.”

강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홀로 산길을 걸었어요. 보잘것없는 농부가 쓴 시를 귀한 눈으로 보는 분이 있으니, 게으름피우지 말고 부지런히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다짐을 했어요. 

오늘까지 다른 사람 덕으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옷을 입고 신발을 신고 온갖 물건을 다 쓰고 살아왔으니, 이 모든 것이 나한테 오기까지 애쓴 사람들을 생각하며 머리 숙이며 살자.’

 

글쓴이 서정홍 시인

(약력: 가난해도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이 글을 써야 세상이 참되게 바뀐다는 것을 가르쳐 준 스승을 만나,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동안 여러 시집과 산문집을 펴냈다. 전태일문학상, 우리나라좋은동시문학상, 서덕출문학상, 윤봉길농민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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