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23-04-17
지역의 분위기는 여전히 살벌했다. 문무자(文無子) 이옥(李鈺, 1760~1813)이 1799년에 쓴 『봉성문여(鳳城文餘)』라는 책에 실린 「鄭仁弘像」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가야면 사촌리 427의 내암 생가터에 자그마한 띠집(茅屋)이 있었는데 그 안에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이 집을 음사(淫祠)라 하면서 100여 년 동안이나 두려워하였다. 어느 날 합천군수가 이곳을 지나다가 이런 이야기를 듣고 “죽은 역적이 무슨 사당인가?”라면서 불을 지르도록 명령했다. 그런데 집은 불탔으나 초상화는 타지 않은 채로 바람에 날려서 펄럭이는 모양이 마치 귀신처럼 보였다. 화가 난 군수는 돌로 초상화를 누르고 다시 불을 질러 태웠다. 얼마 후 군수의 처자식이 먼저 병들어 죽고, 군수 역시 법에 걸려 죽었다. 합천 사람들은 불 때문에 군수 일가가 화(禍)를 당해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고 한다.
고종 때에 이르러 내암의 후손들과 북인 계열 유생들이 여러 번의 복권 상소를 올렸다. 제일 먼저 1863년 12월 고종 즉위 직후 흥선대원군이 사색 타파를 선언하자 내암의 후손 유학 정기덕을 중심으로 첫 신원의 요구가 있었으나 당시 집권층인 노론의 반대로 묵살되었다. 이때 정도전의 신원도 요구했으나 역시 묵살되었다. 다음 해인 1864년 다시 정인홍의 복권 상소가 올려졌으나 역시 무산되었다.
제자인 동계 정온의 노력으로 상각사 인근에 묻힌 지 240년이 지난 1864년(묘 앞의 안내판에는 1864년에 이장했다는데 청람사(晴嵐祠) 안내판에는 1924년이라고 한다.(합천 해인사 아래 부음정에 가다, 민영인, 오마이뉴스 2023년 1월 18일) 가야면 야천리에 있는 청람사는 2003년에 세운 내암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에야 비로소 후손들이 3㎞ 떨어진 야천리(倻川里)의 현 위치인 탑골 뒷산으로 이장할 수 있었다. 이때 1596년에 먼저 죽은 부인의 묘도 이장하여 합분했다. 그러나 고종 원년인 1864년의 집권세력은 노론이었다. 스승인 남명에게 정조가 사제문을 보내 조선의 신하임을 인정한 지 68년이 지났지만 노론은 남명을 은둔생활한 인물로 왜곡시키면서 내암은 계속 역적으로 비난하며 복권시키지 않았다.
이씨조선의 공식적인 복권은 묘를 이장한 지 40여 년이 지나서야(순종 때인 1908년) 이루어졌으니 당연히 이장할 때의 지역 분위기는 여전히 정인홍을 나쁜 사람으로 여기며 협조는 커녕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을 것이다. 퇴계학파가 주류였던 유림들 역시 정인홍을 애써 대접할 마음이 없었다. 임진왜란 때 내암과 함께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켰던 사람들은 중앙정치인과 지방 관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벌써 내암의 측근들은 모조리 제거되었을 것이고, 남은 사람들은 공연히 나섰다가 피해를 당할까봐 외면했을 것이다. 특히 내암 때문에 합천군에서 현으로 각하된 아픈 경험이 있어서 지역발전을 위해서라도 내암을 기피할 수 밖에 없다는 논리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내암의 신원이 늦어진 것은 공식적인 임란사를 다시 쓸 수 없어서라고 하지만 결국 노론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500년에서 무려 285년 동안 역적으로 낙인찍혔으니 그의 후손들과 제자들이 당한 고초가 엄청났을 것이다. 다행히 내암의 고문서 및 서적, 편지도 보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고, 묘소는 2018년에 경상남도 기념물 제292호로 지정되어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제 온전히 명예회복하기 위해서는 합천문화원이 나서서 내암을 청소년들에게 알릴 평전을 만들고, 내암기념관을 중심으로 합천군 차원의 내암제라는 추모행사도 매년 개최하면 좋겠다.
전점석(경남작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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