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15-01-29
지난 주 합천읍을 걷다가 길에서 죽은 고양이를 봤다. 스치듯 봤지만, 찻길에서 죽은 고양이를 누군가 친절하게 사람이 다니는 길에 옮겨놓은 모양새. 차에 짓이겨져 흉측한 사체는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 처연한 아침 풍경이었다.
하루 내내 하얗고 까만 털의 커다란 고양이를 생각했다. 집에 가는 길에는 누군가 더 친절한 마음으로 죽은 고양이의 위엄을 지켜주는 방식으로 치워놓았기를. 집으로 가는 길, 고양이는 그대로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고양이는 또 그 자리에 있었다. 이틀째 죽은 고양이 생각을 하다가 우리 가족이 잃어버린 개, 미니메이 생각도 한다. 도시 인척이 누군가에게 새끼일 때 분양받아 한동안 이뻐하다 감당이 안되니 우리 집으로 방출된, 이런 저런 개 가운데 하나였는데, 이 개는 ‘미니메이’라는 이름을 내게서 받고 우리가 잃어버릴 때까지, 그리고 지금, 잃어버린지 10년이 지났는데도 ‘미니메이’로 기억하는 하나 뿐인 개다.
도시에서 우리 집으로 방출된 이러저런 개들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동네 어르신들의 보양식으로 사라지기 마련인데 미니메이는 가족에게 ‘애견’으로 살아남아 서너 차례 새끼를 낳고 그 새끼 가운데 대부분이 보양식으로 사라져도 우리가 잃어버리기 전까지 우리 ‘애견’이었다.
자식들이 자라 품에서 나가 허전한 부모에게 자식 대신이었고 은둔이 필요했던 내게 작지만 든든한 위로였던 미니메이가 우리와 같이 있을 때만 해도 동네에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개가 서너 마리 있었다고 기억한다. 여기저기서 자기네 애견을 부르는 정겨움이 있었고 이웃의 애견도 이웃의 아이 얘기하듯 챙겨주던 시절이 있었다.
미니메이도 목이 묶이거나 우리에 갇힌 개라기보다 동네 개로 자유로웠다. 그러다 동네 이웃이 자기네 밭 작물을 미니메이가 드나들면서 망치는 모습을 보면 미니메이는 목줄신세가 되거나 우리에 갇혀야 했다. 그 감금의 시간이 잦아지고 늘어나면서 한번 풀려나면(주로 외지에서 온 내가 풀어주곤 했다) 신나서 뛰어다니는 모습은, 어느 날 뒤로 볼 수 없었다.
온 동네를 돌아다니다가도 집에는 꼭 돌아오던 미니메이가 돌아오지 않았다. 동네를 도는 개장수가 잡아갔거나 유해동물용으로 놓아둔 약을 잘못 먹고 사람 없는 곳에서 죽어버렸거나 그도 저도 아니면 흉악한 일을 당했을 터, 부모는 한동안 풀어준 나를 원망하며 미니메이타령을 했고 그 뒤로 집에 개를 잘 들이지 않거나 들어와도 정을 덜 주게 되었다고 기억한다. 동네에 자유로운 짐승은 고양이들 뿐이다.
소도 갇혀서 태어나 팔려갈 때 밖으로 나오고 키우는 개는 목줄에 묶여 짖는다. 길에서 만나는 죽은 새, 죽은 고양이는 저마다 참혹하다. 지구는 사람만 사는 곳이 아닌데, 우리는 왜 이렇게 살고 있을까. 스산한 겨울, 이런 생각으로 더 울적하던 이틀째 되던 날 저녁, 죽은 고양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부디, 누군가의 친절한 손길이었기를.
임임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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