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18-05-15
정순한
예배당이 있는 길을 지나 신작로를 가만히 따라 걷노라면 탱자나무와 사철나무가 어우러진 뒷담장이 보입니다. 갑자기 바빠진 걸음이 골목을 향하면 코끝에 쏴하게 묻어나는 라일락 향기가 감미로웠던 우리 집 오월의 날들은 시간을 한참 흘린 이 나이까지도 그리운 장면입니다. 눈이 아려 옵니다.
잔을 부딪쳐 가며 대망의 새해를 노래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오월의 문턱에 들어섰습니다. 생각해보면 많은 시간을 허비했으면서도 무엇 하나 변변히 이루어 내지 못하고 있는 나 입니다. 또 넘겨 버릴 것만 같은 당초의 새해 계획이 초조한 마음과 함께 부끄럽기까지 합니다.
내일은 ‘어버이날’입니다.
삼백예순날을 잊고 살지라도 이날 하루만은 존재에 대한 감사를 느끼고, 그래서 부모님의 은공을 생각하라고 만들어진 날인 것 같습니다. 자식은 그 부모를 닮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부모와 자식은 배우고 가르치는 어쩌면 사제의 연쇄 관계 같은 것은 아닐는지요. 더욱이 여식 아이는 ‘모전여전’이라고 당신이 누누이 일러주셨었지요.
철이 들락말락한 열네 살의 여식 아이를 옆에 끼고 살면서 당신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갑자기 나 자신의 말과 행동에 많은 두려움이 생깁니다. 오랜 지병으로 고생하시던 당신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지게 아팠었기에, 당신의 누더기 옷을 벗어 던지고 천사처럼 훨훨 날아가길 간절히 기도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당시를 떠올리면 파렴치한 내 자신의 이기적인 행위가 밉고 또 미워서 견딜 수 없을 지경입니다. 땅을 딛고 하늘을 보며 모두가 숨 쉬면서 사는 이웃엔 지천에 널린 어머니의 홍수입니다. 하지만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못한다는 먼 길을 떠나신 지 이태가 지난 유일한 나만의 어머니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있을 리 만무합니다. 당신의 모습이 사무치게 그리운 날은 행여 꿈속에서 만나 볼까 봐 억지로 청해보는 잠이건만, 흥건히 적신 베갯잇에 허망함만을 잘근잘근 씹어 삼킵니다.
당신이 떠나실 때 미처 값을 셈하지 못했던 그리움의 실체가 당신의 설움이 내 설움으로 남겨진 지금에서야 그때보다 진한 값을 치르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느 해보다 빨리 찾아와 길 것만 같은 여름이 무르익는 냄새를 풍깁니다. 여름은 등 뒤에 가을을 업고 있습니다. 항상 내가 즐기지 못하는 가을은 예상보다 조금 늦지 싶습니다.
오랜 시간 타고 갔던 버스에서 내려 가지고도 산길을 몇 굽이 걸어가야 했던, 당신 손에 꼭 잡힌 고사리 손인 채로 외갓집 가던 길이 생각납니다. 갈대의 노랫소리 들으며 당신의 푸근한 등에 업히어 눈부시게 쳐다보던 어쩌면 당신을 꼭 닮은 외가동네의 산천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내 유년의 기억입니다. 당신의 하얀 코고무신이 서러웠던 산길에서 저고리 고름으로 어린 자식 눈치 챌세라 하늘 올려다보는 척 눈물 찍어 내시던, 당신의 흥얼거리던 노랫가락에 되살아나는 내 유년의 산천은 나로 하여금 어른도 가끔씩 울고 싶을 때가 있지만 어른이기에 함부로 울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아침이 오기에는 한참 이른 새벽입니다. 세상사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때, 때 묻지 않은 꿈만 먹고 자랄 때, 아무런 욕심조차도 심지어는 헤어짐이나 이별 따윈 꿈에서도 생각할 수 없을 때, 지금 나의 시간은 그러한 어린 시절의 풋풋한 초록 향을 떠올릴 수 있어 더없이 여유로워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조금 더 잘났다고 큰소리치고 많이 갖고 싶어 안달해가며 살아가는 우리네 일상이 참으로 권태로워 질식할 것 같은 때도 있지만, 놀랍게도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태어나면서부터 잠재되어 있는 것이 우리네 인간인가 봅니다.
피고 지는 잎 새에 희끗희끗한 머리칼이 생겨나 속절없는 울음이 난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것은 눈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마음으로 보아야만 가능하다는 존재원리의 깨달음과 맞바꾼 눈물이었습니다. 언제부턴가 당신처럼의 위치가 점차적으로 가까워졌음을 느꼈습니다.내가 오래전에 버리고 떠나왔던 고향집의 화단에 라일락이 지고 수국이 필 내일이오면, 오월의 아름다운 어촌엔 흐드러진 아카시아 꽃향기가 진동할 것만 같습니다. 이렇게 보내고 맞이하는 많은 시간의 교차에서 나의 날들도 하염없이 저물어 가고 있나 봅니다.
어머니. 그래도 내겐 진정한 사랑으로 불러 볼 수 있는 당신이 계셨다는 것만 해도 가슴 충만한 행복이지 싶습니다. 어느새 오월 팔 일 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멀고 먼 당신의 하늘나라에서 언제나 굽어 지켜보실 당신의 환한 미소가 엄청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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