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16-04-26
이번 호를 시작으로 합천지역의 귀농·귀촌 사례를 살펴보는 기획 인터뷰에 나선다. 그 첫 인터뷰이는 대양면 무곡마을의 권두보·이홍재 부부다. 4월 24일(일) 저녁, 무곡마을 자택에서 이들을 만났다. 아래는 그들과 나눈 얘기다.-임임분 기자
자기소개를 해달라.
권두보:1966년 부산 감천동에서 나고 자랐다. 결혼하고 초등 4학년, 여섯 살짜리 아이까지 네 식구가 2002년 5월에 대양면 대목마을로 처음 귀농했고 2010년 무곡마을로 옮겨 살고 있다.
이홍재:1964년 부산 감천동에서 나고 자랐다.
연고 없는 합천으로 귀농하게 된 계기는?
권두보:부산에 살 때 나한테 아토피질환, 비염, 습진이 있었는데 병원치료로 해결이 안되어, 혼자 이리저리 알아보다가 먹거리를 바꿔봐야겠다 싶어 부산한살림과 연을 맺었고 귀농을 하고 싶어서 알아보는데, 마침 한살림 조합원 한 가족이 합천으로 귀농한다고, 같이 합천으로 가자고 했고, 우리는 방 세 개짜리 집이 필요했는데, 조건에 맞는 집이 합천 대목마을에 있어서, 1년 정도 준비기간을 두고 들어오게 됐다. 아쉽게도, 우리를 대목마을로 이끈 그 가족은 우리보다 1년 먼저 대양면 도리마을로 귀농해 딸기농사를 지었는데, 힘들다, 도저히 못살겠다고 1년만에 농사 접고 합천을 떠났고.
이홍재:합천에 오게 된 일은 운명이다.
권두보씨의 열망으로 귀농하려고 할 때 이홍재씨나 아이들은 선뜻 동의했는가?
권두보:남편은 애처가다. 아이들은 시골살이가 뭔지 몰랐을 때고. 남편은 벤처기업을 운영하는 연구원이었는데 마침 다른 일을 알아볼 때였다. 나는 농촌현실을 전혀 몰랐다. 단순히, 전원생활을 하고 싶은, 재정상황이 나쁘지 않은 도시인이었다. 농촌을 몰라서 용감하게 들어왔다.
귀농을 준비하고 정착하는 과정에서 도움 받은 곳이 있었나?
권두보:우리가 귀농할 때만해도 지금처럼 전문성을 띈 귀농학교가 없었다. 1997년 경제위기 뒤 한창 귀농바람이 불었다가, 실패한 이들이 또 우르르 농촌을 떠나던 때라 귀농에 대한 인식이 좋을 때도 아니었고 지자체나 단체의 지원도 없었고 바라지도 않았다. 농사도, 텃밭농사 수준으로 상상했으니까. 게다가 귀농하자마자 남편이 사고로 이마 부위 두개골이 깨져 응급수술하는 큰 일이 있었다. 다행히 후유증이 없었고. 마을의 귀농인 7농가가 딸기농사를 짓고 있으니 우리도 딸기농사를 해야 하나 보다, 하고 딸기농사도 시작했다. 대신 부산에서 했던 한살림 활동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친환경농사꾼에게 안정된 판로 확보는 아주 중요하다. 농사 시작과 함께 한살림에 납품을 하게 되면서 판로가 안정되어 큰 도움이 됐다.
이홍재:마을 어른들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좋아하셨다. 돌이켜보면, 당시 나는 늘 땀에 절어있었다.
대목마을에서 무곡마을로 주거지를 왜, 언제 옮겼나?
권두보:남편은 자기 일만 하고 외부활동을 하지 않는다. 마을의 원주민과는 다툴 일이 별로 없는데, 또래 귀농인과 어울리는 일은 어려웠다. 이래저래 마음고생 좀 하다가 딸기모종 키우기 위해 외진 땅이 필요해 사놓은 터에 딸기잼공장 짓고 남편 연구실 짓고 하우스도 옮기고 체험장 짓다가 2010년에 주거지까지 옮겨오게 됐다.
따른 작물에 도전해보기도 했나?
권두보:딸기만 했다. 작물을 바꾸거나 추가하면 힘들다. 하던 작물을 하면 기본투자 해놓은 시설이나 장비로 쭉 이어갈 수 있고 농사경험도 그대로 쌓이니까. 우리 나름으로 딸기공부, 엄청 했다. 부여까지 가서 배웠다. 특히 서울한살림 딸기 생산자 한 분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서로 오가면서, 전화로 묻고 하면서. 남편이 벤처기업도 하고 컴퓨터 쪽에 능해서 정보가 필요하면 정보를 찾아내는 능력이 좋았고 컴퓨터프로그램, 전기, 전자에 능한 화학공학 전공자라 농사를 과학적으로 늘 고민하고 접목하고 활용하는 방식으로 지금에 이르렀다.
만 14년차 농민이다. 그동안의 경험을 영농일지처럼 정리해놓기도 했을까?
권두보:영농일지 비슷한 자료가 이번에 컴퓨터 망가지면서 다 날아갔다. 2006년 12월, 농림부에서 낸 『여성농사꾼의 유쾌한 성공이야기』에 딸기농사꾼의 경험을 풀어낸 내 글도 한 편 들어가 있다.
귀농 후발주자들의 도움 요청도 있는가?
권두보:서울귀농학교에서 견학 오고, 우리에게 조언을 받은 한 가구는 우리 집 옆으로 귀농해오기도 했다. 우리 농사법은 주류농업에서 비주류, 친환경농업계에서도 생협하고만 거래하는 비주류다. 합천에서는 귀농사례발표를 군청 요청으로 한 번 한 일이 있다. 생협이 주관하는 판매 관련 소비자강연은 외지로 자주 나간다.
딸기생산 외 가공, 체험사업을 하고 있다.
권두보:딸기잼 가공은 딸기농사 처음 할 때부터 소규모로 하다가 허가 받고 잼공장형태 운영은 2007년부터 본격 가동했다. 한살림 회원 대상으로 1년에 한 번 초청행사도 처음부터 했다. 체험이라고 대단한 규모는 아니고, 우리 딸기를 먹는 소비자를 딸기밭에 모셔서 서로 얼굴을 보고, 딸기가 크는 모습을 보여주고 직접 따게도 해주는, 소박한 형태다. 딸기철이면 바빠서 일부러 체험을 하지는 않는다. 정품 따내고 나면 다 잼으로 가공하기 때문에 체험으로 매출 올릴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단, 우리 딸기 얘기를 꼭 해줘야 하는 자리, 전문가견학은 한다.
현재 농사 규모, 1년 매출, 순수익은 얼마나 되는가?
권두보:딸기하우스 6동에 1년 매출 1억 6천~8천 정도다. 딸기 따는 인력 8명, 운반인력 1명까지 9명 인건비로 1년에 4천만원 정도 나가니까 순수익은 5천만원 정도로 보면 된다.
합천군청의 귀농정책, 어떻게 보는가?
권두보:지자체의 지원 정도에 따라 귀농할 사람이 귀농하지 않고, 귀농하지 않을 사람이 귀농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귀농인에게 가장 절실하고 중요한 사항은 제대로 된 멘토링이 돈보다 중요한 조건이다. 지자체의 지원이 적어서 귀농이 늘지 않는다는 얘기는 말이 안된다고 본다. 지자체에서 개인 귀농자에게 지원해봐야 5백만원일텐데, 그 돈이 귀농에 큰 도움이 되나? 예를 들어 단체로 귀농할 때 길을 닦아준다거나 땅을 구할 때 도움을 준다면 모르겠다. 귀농인에게 가장 좋은 지원은, 살 집이나 농사 지을 땅을 구하기, 농사방법 전수, 현지인과 사귀는 법 조언이다. 쉬운 일은 아닌데, 이런 지원이 일회성이 아니라, 정착을 제대로 잘 하는지도 지켜봐주는 사후관리로 해야 한다. 도시인이 모르는 그 지역의 정서도 파악할 수 있게 도와주면 좋고.
이홍재:귀농인이 농사를 지어 농촌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게 꾸준히 도와주는 일이 중요하다. 좋은 이웃이 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귀농하는 이들은 아무래도 땅값을 가장 많이 보는데, 그 점에서 합천은 아직까지는 경쟁력이 있어 보인다.
- 2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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