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17-10-24
(재경향우. 전행정안전부근무 : 정현규)
우리 동네 앞에는 아주 오래된 정자나무 두 그루가 서있다. 키가 제법 큰 할배 나무와 아담한 높이에 그늘을 많이 만들어 주는 할매 나무다. 시골 어디든 정자나무가 없는 곳이 없지만 특이하게도 우리 동네에는 두 그루다. 원래 느티나무이나 어릴 적부터 정자나무로 불러 익숙해진지 오래다.
이 나무는 우리 동네의 상징이자 자랑이다. 타향에서 처음 만난 고향사람들과 서로 인사를 나눌라치면 어느 마을 출신인지를 빼놓지 않고 묻곤 한다. 이때 나는 늘 우리 동네 이름 ‘맞바우’보다는 마을 앞에 큰 정자나무 두 그루가 있는 곳이라고 먼저 소개한다. 그러면 상대방은 “아, 그 동네!”하며 금방 알아챌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맞바우’란 이름도 동네의 아래 위에서 비석 크기의 두 바위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는데서 붙여졌다. 우연이라고 해야 할까. 마을의 상징인 바위도, 정자나무도 둘이니 말이다.
어른 양팔로 세 아름이나 되는 이 큰 나무는 마을에 처음 사람이 들어와 살 때 심었다고 전해온다. 그러니까 500년을 훨씬 넘기며 온갖 풍상에도 꿋꿋하게 견디어 온 셈이다. 그 긴 세월 동안 우리 마을의 즐거운 일 슬픈 일들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이 나무가 자리 잡은 곳은 동네 뒷산인 금성산, 일명 봉화산과 연결되는 소위 당산이라고 하여 신성시하고 있다. 그래서 작은 나뭇가지 하나라도 함부로 자르질 않는다.
무더운 여름철 이 정자나무는 동민들의 쉼터이자 마을공동체가 된다. 나무가 만들어주는 넓은 그늘과 앞이 탁 트인 시원한 공간은 더위를 피하기에 그야말로 안성맞춤이다. 30℃를 오르내리는 무더위에 여간 고마운 존재가 아니다. 20여년 전만해도 이곳은 마을의 연세 드신 어른들 독차지였다. 시원한 모시적삼에다 부채를 들고서 이곳에 모이면 막걸리 한 잔으로 목을 축이며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을 의논하고, 또 마을의 경조사는 물론 이웃 동네 소식이며, 누구 집 아들이 출세했느니 하는 등의 여러 소소한 일들까지 화제에 올린다. 선거철이 되면 정치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다.
예전에 이 나무 옆에는 두 사람이 겨우 비켜 갈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길이 나 있었다. 인근 마을과 마을을 서로 연결해 주는 간선도로였던 셈이다. 이웃 주민들은 평소 친척집을 오가거나 오일장이 선 대병시장에 갈라치면 이 길을 이용해야 했다. 이곳을 지나던 길손은 걸음을 잠시 멈추고 정자나무 아래 어른들께 어느 마을 누구라고 먼저 인사를 드린다. 그런 다음에는 자기 마을의 어느 누구 어른은 요즘 건강상태가 어떤지 궁금해 하는 어른들의 물음에 근황을 알려주기도 하고, 또 우리 동네 이런 저런 사정들을 알아본 다음에야 떠나곤 했다. 이처럼 전화나 핸드폰이 널리 보급되기 이전에는 나름대로 이 지역사회의 소식을 주고받는 사랑방 역할을 아주 톡톡히 한 셈이다.
어릴 적에 어른들이 농사일에 바쁜 틈을 타 우리들의 차지가 될 때도 있었다. 나뭇가지에 오르내리기도 하고, 공터에 마련된 모래 씨름 터에 또래끼리 씨름도 하며 놀곤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이었나. 동네 청장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들돌’이라는 둥근 화강암 돌을 허리까지 들어올려‘장골’(壯骨)이 되었음을 증명해 보이는 의식을 치렀다. 남자로 태어나서는 한번쯤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였다. 드디어 동네에서 어린애 신분에서 벗어나 성인으로 대접 받게 된 것이다. 인생에 두 번 다시 그런 기쁨이 있을까.
이 나무에도 흘러온 세월만큼이나 그 풍속도가 오늘날에는 크게 달라졌다. 주인역할을 하던 어른들은 거의 별세하거나 건강 탓에 대외 활동이 뜸해지고, 그 많던 아이들도 자라 도시로 떠나자 이제 동네 아주머니 차지가 되었다. 아주머니래야 사실은 70, 80대의 할머니들이 다. 이곳의 60대는 새댁이라는 우스개가 있을 정도다. 6월 중순경 날씨가 점점 더워지고 논에 모심기가 끝나면 아주머니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이 정자나무 아래로 모여든다. 여기에 새로 세워진 육각정에서 공동으로 점심을 지워먹고, 가끔은 저녁까지도 해결한다. 수도며 가스, 그릇, 수저 등의 취사기구를 두루 갖춰놓고 낮에는 공동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농사일과 동네 경조사며 이웃 동네까지의 근황을 화제 삼다 심심풀이로 100원짜리 내기 화투를 치며 한가롭게 시간을 보낸다. 이렇게 한 여름을 보내다 9월초순경 찬바람이 불고, 알밤이 익어갈 무렵이면 이 정자나무도 인적이 드물어진다. 그러다 단풍으로 잠시 장식하다 이마저 훌훌 벗어버리고는 겨울을 지나 새 봄을 기다린다.
사람도 세월이 가면 몸에 고장이 나고, 이런 저런 아픔이 생기듯 이 정자나무도 예외일순 없다. 키 큰 할배 나무의 뿌리에서 뻗어나간 큰 가지가 근래 알 수 없는 이유로 말라 죽었다. 어릴 적 오르내리며 놀던, 추억이 깃든 곳이다. 거기에다 나무 주위 일대가 온통 시멘트로 포장되어 빗물 공급이 부족한 탓에 나뭇잎이 예전보다 못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동민들이 우리 세대에 와서 나무를 죽게 할 순 없다며 막걸리를 사서 부었다. 그러고도 안심이 되질 않아 살충제와 영양제를 살포하기까지 했다.
그래서인지 올해에는 제법 싱싱한 나뭇잎으로 제법 풍성한 그늘을 만들어 보답했다. 고맙기 이를 데 없다. 내년에는 빗물이 자연스레 스며들 수 있도록 두터운 시멘트 바닥도 일부 걷어 낼 예정이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 언젠가는 고사목이 될 것에 대비해 심은 후계 나무도 그 옆에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앞으로 고령 위주의 농촌 인구가 차츰 줄어들 것이라고 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곳에서 자라 도시로 떠났던 사람들이 귀향하고 새 얼굴들이 더해져 우리 마을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이와 함께 두 그루 정자나무 역시 오랜 세월 지금까지의 모습처럼 앞으로도 늠름하게 우리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는 수호목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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