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17-11-21
김경숙(이주홍어린이문학관 문학강좌 수강생)
2010년 2월 어느 수요일, 전화벨이 울린다. 아버지다. “ 니 엄마가 이상하다. 밥도 안 먹고 아무것도 안 한다. 콩나물국을 한 숟가락 먹였는데 다 토해서 지금 병원 갔다 왔다. 안 바쁘면 주말에 집에 왔다가라”. 설 연휴를 합천 집에서 보내고 부산에 온 지 3일째 되던 날이었다. 부산으로 오기 전날 엄마는 “니 가면 나 우짜노” 라고 말했고, 아버지는 눈물을 글썽여서 편치 않은 마음으로 떠나온 상태였다.
그 주 토요일 합천 집에 왔다. 도착해서 본 엄마는 1주일 전의 엄마가 아니었다. 온 몸에서 화가 뿜어져 나오는 듯 했다.
아버지가 옆에만 가도 으르렁 거리고, 눈에는 핏발까지 섰다. 분노의 기운이 온 몸을 감싸면서 방안 공기마저 바꾸어 놓는 듯 했다. 아버지와 엄마를 잠시 떼어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버지도 그것을 원하셨다. 2주 정도 엄마만 부산으로 모시고 가기로 했다. 2주 동안 어떻게 할 것인지를 두고 엄마와 나를 제외한 가족들이 모여서 가족회의를 했고, 결론은 내가 엄마를 모시는 것이었다.
엄마는 자신을 빼고 다른 가족들이 모여서 얘기를 하고 있으니 분명 자신을 갖다버리기 위한 모의를 한다고 생각하셨다.
엄마가 치매진단을 받은 지는 6개월 정도 되었지만, 이미 초기단계를 넘어 중등도 단계였기에 정확한 판단이 되지 않는 상태였다. 바람 쐬러 가자고 하는데 집을 나서지 않으려 했다. 나들이 간 곳이 평지가 아니었고, 작은 개울이 있어서 손을 잡아주려고 하니, “내 등신 아니다”라고 하시면서 도움의 손길을 거부했다. 실수하지 않으려고, 자신이 정상임을 증명하려는 듯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었다. 부산으로 가는 내내 가만히 앉아있지를 못하셨다. 다른 곳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오빠 집에 간다고 아무리 말해도 믿지 못하셨다. 눈이 불안함과 두려움에 흔들리고 손이 가만있지를 않았다. 오빠 집에 도착해서야 낯익은 공간이라 조금 안심하는 듯 했다. 그렇게 오빠 집에서 하루 밤을 보냈다. 긴 하루였다.
다음날 큰오빠 내외는 출근을 하고 엄마와 나만 남게 되었다. 언니와 점심을 같이 먹기로 했다. 약속 장소에 가기 위해 택시를 타려는데 “어디 갖다버리려고” 하시며 차를 타려하지 않으셨다. 식당에 도착해서 음식을 시켰지만 “먹여서 보내려고” 하시며 드시지 않고, 옷을 사기 위해 시장에 들렀더니 “새옷 입혀서 내다버리려고” 하신다. 식탁에서 언니와 차 한 잔 하면서 얘기하는데 엄마가 갑자기 소리친다. 자기 얘기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낮에는 꼿꼿이 앉아 계시고, 밤에는 눕기는 해도 주무시지는 않으셨다. 그녀와 함께 하는 시간 내내, 버리지 않아요, 며칠간 부산에 있다가 다시 집에 갈 것이고, 쉬지 않고 기계를 작동하면 고장이 나듯 엄마도 너무 몸을 많이 쓰서 예전과 다르게 작동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그건 정상적인 것이고 엄마만 그런 것이 아니라고 얘기했다. 그렇게 한 3일 정도 지나니 불안감도 가시고, 아버지에 대한 분노도 가라앉는지 아버지 얘기를 하셨다. 아버지 역시 엄마가 보고 싶은지 3일째 되던 날 전화가 왔다. 엄마 보고 싶으면 부산 오시라고 했더니 다음날 부산에 오셨다. 아버지를 다시 만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로 꼭 붙어서 얘기를 하신다. 그러나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2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또다시 으르렁 거렸다. 아버지는 이틀정도 머무르다 다시 합천으로 가시고, 엄마는 그 후에도 1주일 정도 더 부산에 머물렀다.
나는 알 수 없는 세상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도 없고, 내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에만 무게를 두는 성격이다. 천국이니 지옥이니 하는 죽음 뒤의 세상에는 관심도 없고,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환경이나 처지를 탓하면서 시간만 보내는 것에 대해서도 좋아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을 찾고, 바라는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하고 그 일을 하면서, 또 그 세상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자신을 다듬어가기 위해 배움을 멈추지 않으며 살면 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 내게 엄마와 함께한 2주는 삶에 대한 태도의 연장으로 잘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자신을 위한 모든 행위에 화를 내는 엄마를 보면서 저렇게 생을 마감한다면 참 불행하겠다, 그리고 혹시 있을 수 있는 다음 세상도 분노로 가득찬 사람들로 인해 참 힘들고 아프고, 어두운 세상이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죽기 전에 자신을 만나 분노와 응어린 한을 풀고,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엄마에게도 가슴 속 분노를 풀 시간, 자신과 화해하고 세상과 이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자신이 얼마나 사랑받고 귀중한 존재였는지 알게 하는 시간 그 시간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2주의 시간이 흐르고 장기적인 대책을 위한 가족회의가 열렸다. 요양병원과 자식들이 있는데 어떻게 요양병원에 보낼 수 있느냐를 두고 결론이 나지 않았다. 나는 당시 상황에서는 지금처럼 합천 집에서 두 분이 함께 살고 돌보는 사람이 함께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기에 내가 합천 집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겠다고 했고, 1년을 전제로 그렇게 하기로 결정되었다.
집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 엄마, 그리고 돌봄이 필요한 아버지, 삶과 죽음에 대한 내 가치사이에 교집합이 만들어져 오늘의 동행이 가능해졌다. 그렇게 나의 합천 생활은 시작되었고, 가끔은 엄마의 뜻인지, 내 뜻인지 의심하기도 하고, 때로는 내 욕심이 아닐까 돌아보기도 하지만, 엄마의 의사 존중을 가장 우선 순위로 두고 8년째 엄마와의 동행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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