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17-12-05
태조2년 새로운 왕도(王都)를
선택하라는 어명을 받은
무학왕사는 전국 각지를 순행하면서
왕도를 물색하던 중
한양과 계룡산 신도안 두 곳 중에서
먼저 신도안에 궁궐터를 닦기 위하여
부역군 15,000여명을 동원
성곽을 쌓는 등 한창 공사를 진행중에
하루는 야밤중에 주산인연천봉에
백발노인(산신도인:山神道人)이
나타나서 엄정히 꾸짖고
호통을 치면서
지금 이 자리는 뒷날 정씨(鄭氏)가
도읍터로 정해 놓은 땅인데 800년 정씨 도읍터에
감히 이씨가 왕도로 차지한다?
어림도 없는 소리! 깜냥없게!
썩 물러나시오!
아무리 정성들여 지은 집도 완공 후
집주인은 대목수가 차지 할 수는 없고
천하명당길지(名堂吉地)라고 하더라도
풍수지관 누울 자리 아니다!
계룡산 신도안은 산태극수태극(水太極)
용이 하늘을 날고 봉황이 알을 품는
대명당터로 국사봉까지 곁들였으니
불법으로 왕권을 찬탈한 이씨왕조
절대 안되지! 이씨의 도읍지는 한양땅이요~~
무학왕사, 부득이 숙의 끝에 이성계를 설득하여
다시 궁궐터를 한양으로 정하는데
인왕산(仁王山)을 진산으로
백악(白岳)을 청용으로
남산(南山)을 백호로 하여
동향으로 바라보는 대궐을
짓고자 왕의 허락을 받았으나
강력한 실권을 가지고 조정을 주무르는
정도전 일파들이 들고 일어나
예로부터 제왕들은
남면이치(南面而治)라 하여
무학왕사의 주장을 묵살하며
절대 불가로 반기를 들고 나섰다
유생(儒生)들의 패거리
힘에 밀려 무학왕사 안타까워
“두고 보십시오! 소승의 말 듣지 않고
정도전 주장대로
백악을 진산으로
인왕산을 백호로
남산을 청용으로
남향 대궐을 지으면
향후 200년 후에 큰 환란이
일어 날것이요
그때 소승 생각이 날것이요!”
과연 200년 후에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 대궐은 불타버리고
피로 얼룩진 삼천리 금수강산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이리가면 전라도요
저리가면 경상도라
인생길 나그네길 차라리 돌아갈까
이조 200년 사색(四色)당쟁
이제 다시 재현되나?
이판사판(理判事判) 갈림길!
우국지사 국가원로 어디메 계시온지
나라 스승 찾아보자!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던지 형통하리라(구,여:1.7)
영세중립(永世中立) 평화통일!
좌우화평 중용지도(左右和平 中庸之道)
올곧게 수양된 참 스승 찾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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