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18-04-10
김의섭
나는 지난해 유월 말에 사십 년이 조금 넘은 세월 동안 걸치고 있든 거추장스럽든 옷을 모두 벗어 버렸다. 실은 내가 벗어 버린 게 아니고, 세월이 그 옷을 벗게 했다. 스무 살을 갓 넘긴 1977년 일월 초, 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던 날 사회초년생 면서기가 되면서 입은 옷이다.
그 옷 덕분이라고 해야 할 일인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나이로는 상당히 늦은 서른한 살 되던 봄날에 가까스로 결혼했다.
경제적 자립이 되지 않아서 신혼 초부터 아내와는 주말 부부로, 큰아들이 일곱 살이 될 때까지 지속했다. 아내가 근무하는 창원 시내로 전출 가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법과 원칙이라는 이름으로 가면을 쓴 관행이 그 무엇을 요구해 왔다. 양심이 도저히 용납하지 않아서 내가 전출 가는 일을 접었다.
아내는 힘든 고민 끝에 창원 생활을 정리하고 내가 사는 곳으로 내려왔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아내와 두 아들의 얼굴을 함께 볼 수 있었다. 두 아들이 무척 좋아했다. 작은 행복이 미소짓고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의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내는 인근에 있는 근무처로 출퇴근하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고, 나는 밤이 늦도록 야근에 매달려야만 했다.
야근에 몰두하다 보면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잠든 아내에게 전화해서 데리러 오라고 하면, 아내는 무섭다며 잠든 큰아들을 깨워 차에 태운 채 오십 리 길을 달려와서 함께 퇴근하곤 했다. 졸음을 참으며 운전하는 아내의 얼굴을 보면 코끝이 찡해와서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공휴일 놀이공원 가자고 조르는 아들의 애원을 외면한 채 발걸음을 직장으로 옮겨야만 하는 생활은 사십 대 중반이 넘도록 연속되었다. 두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교행사에는 한 번도 참석하지 못했다. 결혼기념일과 아내 생일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은 내 머릿속에 없었다. 자녀 양육과 가정일은 아내에게 미룬 채 직장 일에 목을 매고 살았다. 빠르게 승진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경제적 여건 또한 크게 나아지지 않은 채 오십 대 중반을 맞이했다. 퇴직이라는 단어가 나의 화두가 될 무렵, 승진해서 고향 면장으로 공직생활을 마감했다. 작은아들이 훈장증을 보며 그가 좋아하는 대통령이 준 훈장이라서 뿌듯하다고 했다.
나는 퇴직하면서 전업주부 되길 자청했다. 아침 시간은 다른 시간보다 분주하다. 겨우 눈뜨고 아침상을 차리고 나면 7시 30분이 된다. 아침상이라고 해 봐야 밥과 국, 반찬 세 가지 정도이다. 아내는 요사이 아침밥을 잘 챙겨 먹으니까 살이 더 찐다면서 밥을 잘 먹지 않는다. 그래서 생식 가루 한 봉지 두유에 타 놓고, 사과 한 개 씻어서 네 쪽으로 잘라 놓으면 아침밥 준비는 다 되는 편이다. 아내는 서서 두유 한 컵을 들이킨 후, 왼손으로 사과 두 쪽을 집은 채 허둥지둥 현관문을 열다가 “김밥 먹고 싶다. 전에는 종종 김밥도 말아먹곤 했는데” 하고는 출근길에 올랐다.
아내는 지난해 가을이 오기 전에 몸이 좋지 않다며 병원에 가보자고 했다. 진단결과 암이 발견되었다. 남의 일처럼 여겼던 일이라 불안과 초조함으로 나날을 보냈다. 대신 할 수 없는 아내의 아픔이었기에 더욱 마음이 아렸다. 병원 몇 군데를 쇼핑한 후 수술을 했고, 결과는 좋았다. 아침이면 몸을 추스르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아내의 분주한 발걸음을 보며 설거지에 돌입한다. 집안일을 해 보니 쉴 틈도 없었고, 아무리 해 놓아도 본치 또한 나지 않았다. 거칠어진 손에 핸드크림을 바르다가 주부습진 걸린 아내에게 면박을 주었던 일이 생각났다. 여태껏 아내를 일 속에 가두어 둔 게 많이 미안했다.
2월의 마지막 날 오후 늦은 시간, 겨우내 기다렸던 봄비가 촉촉하게 내렸다. 며칠 전 아내가 출근길에 던진 말이 생각났다. ‘그래 김밥 만들어줘야 한다.’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마트에 들어가 김밥 재료를 골랐다. 어떤 재료를 사야 할지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집 냉장고 속만 믿고 햄 2봉지, 단무지 1봉지만 샀다. 집에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다양한 재료도 있어야 하고, 재료 손질도 제법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혼자 힘으로 김밥 만들어 퇴근하는 아내와 함께 저녁 먹는 일은 어려울 것 같았다. 사 온 재료만 조용히 냉장고에 넣어 둔 채 저녁을 준비했다.
삼일절 아침, 지난밤 내렸던 비는 그쳤는데, 바람이 매우 심했다. “여보 바람이 엄청 세네. 바깥에 못 나가겠다. 우리 김밥 만들까?” 아내가 김밥 재료는 있느냐는 듯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당근과 우엉을 손질해서 길게 잘랐다. 햄과 어묵을 굽고, 달걀 물을 만들어 팬에 두르며 분주하게 재료를 준비했다.
“내가 지도할게. 당신 김밥 한 번 말아봐.” 아내가 나에게 명령같이 말했다. 대발을 찾을 수 없었다. 찾기를 포기하고 붓글씨 쓸 때 사용하는 대발을 비닐봉지 속에 넣어 사용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밥이 문제였다. 물컹하면 안 된다고 해서 물을 적게 부었더니 밥알이 날아갈 정도로 딱딱했다. 대발 위에 김을 한 장 편 후 밥을 얇게 깔고, 그 위에 햄, 단무지, 우엉, 당근, 시금치, 어묵을 가지런히 올리고 조심스레 김을 잡고 둥글게 말아본다. 밥알이 붙지 않고 제각각 놀면서 김밥 옆구리가 터졌다.
겨우 말아서 대발로 단단하게 조여 주니까 쭈글쭈글한 김밥 한 개가 완성되었다. 아내가 보더니 작품이 시원찮은지 시범을 보이겠다며 잘 보라고 한다. 역시 아내가 만든 김밥은 품격이 다르다. 탱탱하게 잘 말려진 데다가 내용물 배치도 좋아서 김밥 단면이 환상적이었다. 겨우 김밥 네 줄을 만든 후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야 맛있다” 아내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지나온 시간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였다. 우리의 남은 생애를 위해 그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 땅에 존재하며 누구에겐가 필요한 사람이 된다면 후반전의 삶도 외롭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겨울은 모질게 추웠는데 어느새 담장을 사이에 둔 이웃집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망울을 터뜨리기에 분주하다. 유난히 팍팍한 김밥에 목이 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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